[이야기 그림 70] 재미 솔솔

 
기계식 키보드를 샀다. 
 
흡사 클래식한 타자기처럼 보인다. 눌러도 반응을 느끼기 힘든 최신식 얄상한 키보드에 비해 둔하고 느리지만, 누르는 느낌이 정확하게 감지되는 게 좋다. 마치 발음이 정확한 사람의 음성으로 재미난 이야기를 듣는 기분이다. 내가 재밌는 글을 쓰지 못하니까 이런 생각도 하는 것 같다.
 
가끔은 재미란 걸 찾기 위해 노력하고 싶다. 쓰고 그리는 일이 이미 생업이 되었으니 행위 자체에서 재미를 느끼는 일은 포기한 지 오래다. 다만 고통도 완성도를 향한 과정이니까 억지로 즐기고 있을 뿐이다. 
 
재미가 지루한 일상에서 날 구원해줄지 의문이지만, 찾으려 애쓴다. 한 해가 저물 때마다 습관적으로 내년을 계획하는데 올해는 마음이 조금 다르다. 어떤 목표나 성취하고는 거리가 먼 것을 생각한다. 그래서 실력향상에 목매지 않고 오로지 과정이 주는 재미에 취해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했다.
 
하루 한 끼라도 정성스럽게 음식을 장만해 식사를 하기로 했다. 일단 부족한 식기를 장만하고, 채식요리(완벽한 채식주의가 되긴 어렵겠지만) 레시피를 정리했다. 
 
음식의 풍미를 위해 처음으로 향신료 몇 가지를 샀다. 그중 글라인더가 달린 예쁜 후추통이 가장 마음에 든다. 하얀 국물 요리에 후추를 뿌리니 부족한 음식 솜씨가 적당히 감춰지는 느낌이다. 향신료 전쟁이 난 이유를 알겠다고 했더니, 내 말을 듣던 친구가 가소롭다는 듯 비웃는다.
 
어릴 적 배웠던 피아노를 다시 배우고 시도 조금씩 써보려고 한다.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은 것도 아니고 시인을 꿈꾸는 것도 아니다. 바둑을 배우고 싶다는 친구에게 왜 하필 바둑이냐고 했던 어리석음을 지금은 후회한다.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좋아하는 드라마의 다음 시즌을 기다리는 일에 몰두하는 사람, 가까운 산을 자주 오르는 사람, 필라테스로 체력을 관리하는 사람, 유기동물보호센터에서 자원봉사를 하며 주말을 보내는 사람. 먹고 사는 일 외에 몰두할 무엇을 찾는 사람들의 마음을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살아가야 할 일상을 위해 아무 기대 없이 몰두할 수 있는 일이 필요하다. 올해 남은 시간 동안 그런 일을 떠올려 보는 것도 나름 재미가 쏠쏠하다.
 
글・그림 / 고정순 어린이그림책 작가이자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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