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그림 69] 비둘기와 에어컨

 
오늘 에어컨을 수리했다. 가을에 왜 에어컨을 수리했을까? 이유가 있다면 지난여름 수리 시기를 놓쳤기 때문이다.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실내온도가 36도를 넘는 여름날, 집에 손님이 방문했다. 평소 에어컨을 가동하지 않아 꼬박 1년 만에 에어컨을 작동한 날이었다. 손님을 위한 배려였는데 에어컨이 작동하지 않았다. 냉매에 이상이 있는 것 같다며 수리를 받으라는 손님의 충고대로 AS센터에 문의하고 대기 3주 만에 방문 수리를 받게 된 날 놀라운 사실을 하나 알게 되었다.
 
고장의 원인은 냉각 판에 이물질 오염이었는데, 바로 비둘기의 배설물이 문제였다. 그런데 냉각 판을 바로 교체하면 되는 간단한 문제 앞에서 나는 갈등했다. 바로 에어컨 실외기 안쪽에 있던 비둘기 알 때문이었다. 실외기를 들어내고 그 안을 청소해야 하는데 비둘기 알 2개를 어찌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일단 실외기를 운반하는 인력도 부족하니 수리를 뒤로 미루기로 했다. 
 
두 개의 알을 어찌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다른 곳으로 옮기면 어미 새가 놓칠 수도 있고 옮긴다 한들 내가 부화를 도울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또 한편으론 세상의 빛을 한 줄기도 받아 본 적 없는 이 알들이 생명이 맞는 것일까, 판단이 서지 않았다. 무엇보다 지난겨울부터 에어컨 실외기 위에서 사랑을 나누던 두 마리 비둘기가 떠올라 괴로웠다. 그들 관계가 남긴 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불특정 비둘기들과 다르게 느껴졌다. 
 
그래서 아는 존재가 더 무서운 법인가? 유달리 자주 날아와 뜨겁게(?) 사랑을 나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틈에 우리 집 실외기와 벽 사이에 알을 놓고 갔구나. 세상 어디에도 알을 놓고 갈 만큼 안정적인 공간을 찾을 수 없었던 비둘기들에게 저 좁은 틈새가 둥지가 되어줬구나.
 
하지만 몇 달이 지나도 어미 새가 오지 않았다. 다시 날아와 알을 품지 않는 걸 보니 알은 생명이 되지 못할 운명이었나 보다. 나는 올해 여름은 비둘기 알을 지키느라 에어컨을 버렸다고 말하고 다닌다. ‘동화에 나올 법한 이야기’라며 친구들이 농담과 진담을 섞어 말했다. 오늘 에어컨을 수리하며 부화하지 못한 비둘기 알 두 개를 쓰레기봉투에 담았다. 
 
도시의 새들에게 어떤 서사와 은유가 있는지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싶었는데 나도 내년 더위가 무서웠나 보다.
 
글・그림 / 고정순 어린이그림책 작가이자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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