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생협 공제

지난 9월 8일 한살림생협연합회를 비롯한 아이쿱, 두레, 행복중심, 한국대학생협연합회로 구성된 국내 5개 생협연합회는 민형배, 배진교, 송재호, 이정문 국회의원과 함께 ‘신뢰 기반 생협 공제의 시행과 기대’라는 주제로 온라인 국회 포럼을 열고 국내 생협의 공제 시행을 촉구하는 공동 기자회견을 진행했다. 
 
국내 생협의 공제 사업은 2010년 3월 국회에서 「소비자생활협동조합법」 개정안이 통과됨에 따라 생협의 주요 사업범위로 포함되었지만, 주무부처인 공정거래위원회에서 공제 사업 시행령과 방안 등 필요한 후속조치를 방기함에 따라, 10년이 넘은 지금도 시행하지 못하고 있다. 공정거래위원회의 역대 위원장은 조속히 생협 공제 시행방안을 마련하겠다고 공언했지만, 빈 말일 뿐이었다. 2017년에는 느닷없이 ‘생협법 개정안’을 내놓고, 생협의 공제 사업을 생협전국연합회 차원에서만 할 수 있도록 허용하겠다고 했지만 당시 5개 생협 진영의 거센 반대에 부딪혀 무산되었다. 당시 5개 생협 진영은 국내 생협의 구성상 다수의 의료생협이 존재하는 현실에서 사실상의 ‘생협전국연합회’가 설립되기 힘든 점을 이용해 공정거래위원회가 생협 공제를 무산시키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 이후로도 지금까지 10여 년째 생협 공제는 제자리 걸음이다. 각 생협연합회의 특성과 생활공동체 운동으로서 한국 생협의 역사, 그리고 생협 공제가 가진 의미와 사회적 역할에 대한 정부의 무지에 기반한 무성의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글은 생협 조합원이든 아니든,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는 생활의 위험을 공동체를 통해 해결할 수 있다는 새로운 상상을 제안하고자 한다.
 

삶의 위협에 대비하는 방법

 
대부분의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어려움과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준비를 혼자서 해결해야 한다. 고령, 질병, 사고에 대비하거나 은퇴 등 경제 활동이 끝난 이후의 어려움에 대처하기 위해 우리는 돈이 있을 때 보험 상품에 가입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의 삶의 어려움을 감당하고 극복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시장에서 돈을 많이 벌어 미래의 나와 가족의 위험에 대비할 수 있는 보험 상품에 가입하는 방법 뿐이다.
 
그러나 삶의 위험이 누구에게나 다가오더라도 모두가 위험에 대비할 수 있는 상품에 가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경제적 상황이 좋지 않은 사람일수록 더 많은 위험에 노출되기도 하지만 오히려 이들은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는 체계에 접근조차 하지 못할 때가 많다. 심지어 보험회사는 자신들이 정한 기준에 맞는 경제적·신체적 조건을 가진 사람들에게만 보험에 가입할 자격을 부여하기도 한다.
 
돈이 있어 보험 상품에 가입한다고 해도 미래의 우리 삶이 온전하게 보장되는 것도 아니다. 오랜 기간 많은 경제적 부담을 무릅쓰고 보험 상품을 유지하지만, 각종 삶의 위협 요소에 다 대응할 수도 없다. 질병이나 사고 이력에 의해 부담보가 걸리거나 담보 제한을 받기도 한다. 결국 우리는 거대 보험회사가 정한 특정 위험들에 한하여, 그들이 정한 기준에 따라 가입 여부를 통보받고, 그들이 설정한 계약조건을 완전히 만족시켰을 때 비로소 의료비, 생활비 등 ‘보상’을 받을 수 있다. 물론 보험금을 지급받고 난 후의 상황은 다시 온전히 개인의 몫이 된다.
 
모두가 알고 있듯이, 삶의 다양한 영역에서 겪는 어려움은 금전적 보상만으로는 회복되지 않는다. 개인마다 삶의 형태가 다르고, 위험의 크기도 같지 않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신체적 기능이 손상되었으면 병원에 가라’는 것이 그나마 유일한 선택지다. 모든 것이 시장에 의해 규정되고 효율이 최우선의 가치가 되는 시장의 문법을 따르기 때문이다. 개인이 겪는 어려움은 개인이 알아서 다 감당해야 하는 구조인 것이다. 이러한 시장의 작동 방식에 의존해서 삶의 안전망을 준비하는 것은 때로는 효율적으로 보이기도 하고, 심지어 불가피하게 보이기도 하지만 한계는 언제나 명확하다. 지금 우리 사회에  절실히 필요한 것은 ‘개인이 다 감당하는 삶’이 아닌 경제적·신체적 조건과 상관없이 ‘함께 어려움을 극복하는 삶’이다. 
 

생활협동의 새로운 상상, 공제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에서 함께 어려움을 극복하는 삶을 상상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이런 삶을 상상하고 실현해나가는 사람들이 분명 존재한다. 생활협동조합(이하 생협)이 그 가운데 하나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인간은 돌봄을 필요로 하고, 그 돌봄은 이웃들과의 관계 속에서 실현된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서로 돕고, 돌보며 살기 위해서는 삶에서의 협동이 필요하다. 이를 기획하고 실천하는 공동체인 생협은 지역 주민들이 자신의 생활권을 기반으로 삶의 필요를 충족하기 위해 결성한 협동조합이다. 조합원이 된 지역 주민은 누구나 공동체를 통해 다양한 삶의 필요를 충족할 수 있다. 지금은 그 삶의 필요가 먹거리와 생활용품의 직거래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지만, 우리는 ‘함께 어려움을 극복하는 삶’을 위해 더 넓고 깊은 생활의 협동이 필요하다. 생활에 필요한 협동은 먹거리에만 한정되지 않고, 생활에서 마주하는 다양한 어려움으로 확장될 수 있고 확장되어야 한다.
 
이를 위한 새로운 상상으로 ‘공제’를 제안한다. 본디 공제(共濟)는 ‘힘을 모아 서로 돕고 돌본다’는 뜻이다. 파편화된 개인이 아니라 도움을 주고 받는 평등한 관계를 전제하고 있다. 공제는 서로의 삶을 도우며 함께 살아가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다. 그렇다면 생협이야말로 공제의 지향과 가장 부합하는 곳이라고 생각한다. 생협이 공제 사업을 시행한다면 경제적 수준에 따라 삶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안정적인 삶을 보장할 수 있도록 소득 수준에 따른 분담금 정책을 만드는 것을 상상해볼 수 있다. 또한, 공제 사업 자체를 이윤이 아닌 개인의 생활상의 위험 대비는 물론 공동체 전체의 안전을 위한 목적으로 할 수 있다. 수익이 있을 경우 대주주가 막대한 이익을 독점하지 않고, 조합원들이 평등하게 공동체의 안전과 이익을 위해 환원할 수 있다. 이를테면 교통 사고 상해를 개별적 보상 외에 사고 방지를 위한 시설, 교육 등 주민 공동체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공익적 목적에 사용하면 어떨까? 개인의 사고 위험에 대처하는 것을 넘어 위험을 근본적으로 줄일 수 있다. 나의 안전을 생각하는만큼, 우리 마을의 안전을 같이 고민한다면, 나의 안전은 더욱 확실해지고 나의 위험 대비 부담도 줄어들 수 있다. 
 
우리 사회에는 이미 지방공공단체, 노동조합, 공익법인, 공제조합 등 다양한 집단에서 해당 법령에 근거하여 공제사업을 시행하고 있다. 일본에서도 협동조합법과 개별 협동조합법에 의거해서 다양한 공제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일본 생협 역시 활발한 공제사업을 진행하고 있는데 2020년 일본 전국생협연합회의 공제 가입자 수가 2160만 명을 상회하고 있다. 
 
생협 공제와 영리 보험의 차이는 삶의 보장의 책임을 개인에게 전가하느냐, 공동체가 함께 나누느냐에 있다. 또 위험의 결과에 개인들이 수동적으로 대응할 것인가, 아니면 위험의 원인을 공동체적 방식으로 능동적으로 해결할 것인가에 있다. 물론 아직 시작도 하지 않은 생협 공제가 우리 사회의 위험을 모두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개인과 사회의 안전을 위한 다양한 방안을 제안하고 선택할 우리들의 자명한 권리를 스스로 포기할 이유는 없다.
 
지금까지 우리나라 생협 운동은 지역을 기반으로 개개인의 생활에서 나타나는 요구들을 공동체적 방식으로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생협 조합원들은 물품 이용뿐만 아니라 서로 만나 삶을 나누며, 서로의 삶이 이어지는 지점에서 공동체를 위한 중요한 정책과 사업들을 만들어왔다. 자원순환, 기후행동, 햇빛발전, 민중교역 등이 좋은 예다. 생협의 이러한 지향과 사업경험, 보이는 관계를 기반으로 하는 사업방법은 생애주기에 따른 조합원, 주민들의 다양한 삶의 요구를 반영하는 새로운 사회 안전망, 공제의 한국적 모델을 구축할 수 있고, 이는 더 나아가 위험사회의 공동체적 전환을 모색하는 사회적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생협의 공제는 각자의 위험을 개인의 책임으로만 가두지 않고 그 결과와 원인에 대해 서로 의논하고 고민하면서 서로의 삶에 책임있게 관여(engagement)하는 새로운 생활공동체 운동이 되어야 한다. 그러할 때 생협 공제는 생협만의 공제가 아니라 지금까지 우리사회의 기능적·기계적 연대를 통합적·유기적 연대로 전환하는 사회적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점도 잊지 말아야 한다. 
 

생협 공제와 돌봄의 만남

 
최근 공제와 같은 사회안전망으로 ‘돌봄’이 생협의 중요한 화두다. 5년 이내 초고령화사회로 진입하게 되는 사회의 현실적 문제들이 큰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노인이 된다는 것은 경제적 결핍, 사회적 고립, 외로움, 건강 문제 등의 삶의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한국의 노인 빈곤률, 자살률은 부끄럽게도 세계 최고 수준이다.
 
우리 사회에는 노인이 되면 요양 시설로 입소하여 치료를 받으며 생을 마감하는 것이 당연하고 불가피한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하지만 무조건적인 시설 입소는 노인의 삶을 돕는 수단이기는커녕 파괴하는 것임을 보여주는 사례가 많다. 요양시설이 ‘현대판 고려장’이라고 불리는 것은 이런 현실을 그대로 보여준다. 이를 생활의 협동으로 극복하기 위해 생협에서는 ‘돌봄’에 대한 논의와 실천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한살림생협의 경우 2012년부터 본격적으로 조합원 대상 돌봄 설문조사를 진행하며 준비를 해왔고, 최근에는 한살림서울에서 ‘한살림돌봄사회적협동조합’이 출범하기도 했다.
 
생협의 돌봄은 기존의 먹거리 운동, 또 앞서 이야기한 공제와도 뜻이 닿아있다. 공통적인 핵심은 그동안 우리가 각자의 필요를 알아서 찾고, 혼자 그 부담을 모두 감당해야 했다면 이제 협동의 방식으로 서로의 삶의 무게를 함께 나누자는 것이다. 생협의 돌봄은 돌봄이 필요한 누군가와 돌봄을 제공할 누군가를 시혜와 수혜의 관계가 아니라 ‘서로 돌봄’의 관계 맺기로 만드는데 집중하고 있다. 이는 먹거리에서 소비자와 생산자가 직거래를 통해 연결되고, 공제에서 개인과 공동체가 수평적 관계를 맺는 방식과도 같다.
 
생협은 돌봄과 공제의 만남도 상상한다. 공제의 핵심은 협동적 관계를 형성함으로써 삶의 위협에 대응하겠다는 것인데, 돌봄이 필요한 삶의 문제도 ‘서로 돌봄’의 관계를 통해 해결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돌봄과 공제는 분리되지 않고 결합함으로써 그 효과를 증폭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공제 사업이 지역사회 돌봄의 거점이 되는 일정 규모 이상의 복합 재가 서비스 기관을 구축하는 방안으로 연결될 수도 있다. 또 돌봄운동의 핵심과제인 돌봄 노동자의 안정적 고용 보장과 저평가 되어온 돌봄 노동의 사회적 가치를 제고하는데 생협 돌봄이 하나의 모범을 제시할 수 있다. 또한 국가 주도로 진행되는 ‘지역사회 통합돌봄(community care)’의 네트워크 내에서 제도화 되지 않은 다양한 돌봄 사례들을 발굴하여 사회에 제시할 수도 있다. 나아가 생협 뿐만 아니라 사회적 안전망을 구축하고자 하는 사회적경제 부문의 다양한 조직들과 함께 지역사회의 촘촘한 사회 안전망을 형성할 수도 있다. ‘생협-의료사협-돌봄협동조합’과 같이 다양한 연결망을 상상하고 제안할 수 있다. 
 
생협 공제와 노인 돌봄을 결합하는 상상력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있다’를 현실로 만들 가능성을 품고 있다
 

생협 공제에 남은 과제

 
우리는 늘 알 수 없는 미래를 두려워하며 살아간다. 두려움의 근본적 원인은 고립된다는 감정이다. 나의 삶이 다른 누군가의 삶과 연결된다면, 연결되는 관계 속에서 함께 미래를 만들어갈 새로운 삶의 방식이 실현될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은 조금 더 나아질 것이라 믿는다. 이를 위해 우리에게는 더 많은 상품이 아닌 새로운 협동의 방식이 필요하다. 새로운 삶에 대한 상상력이 지금만큼 절실한 때가 없었다.
 
어쩌면 우리의 상상은 그렇게 새로운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계, 두레, 품앗이 등 일찍이 우리 선조들이 걸어왔고 꿈꾸었던 오래된 미래일 수 있다. 생협이 전부일 수는 없지만, 생협이 시작하는 공제와 돌봄은 더 나은 사회를 향한 수많은 상상력을 실현할 수 있는 시작이 될 수 있다고 본다. 10여 년간 지체된 생협 공제의 시행방안이 조속히 마련되어 우리의 논의가 더 풍성해질 수 있기를 바란다.
 
 
글 / 김진아 모심과살림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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