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 국책사업, 그 후 05] 또 다른 갈등의 시작, 시화호 난개발

지난 10월 17일, 흐리고 쌀쌀할 거란 예보와 달리 오이도의 아침은 청명하다. 까마귀의 귀를 닮은 섬이라 오이도(경기도 시흥시)라 불렸지만 일제 강점기 염전을 일구면서 육지가 됐다. 1980년대 말, 안산시 대부도와 연결되는 12.6킬로미터 방조제가 놓이고 공단이 조성되자 섬이라는 정체성은 사라졌다. 방조제가 이어진 대부도 또한 같은 형편이다.

사라진 것이 그뿐이겠는가. 바다를 방조제로 막아 형성된 시화호는 90년대 수질오염의 대명사였다. 국토를 넓힌다는 미명 아래 자행된 무분별한 간척사업으로 사람과 자연이 모두 살 수 없게 된 곳이 바로 시화호였다. 방조제 완공 후 20여 년이 지난 현재 시화호의 겉모습은 평온한 가면을 쓰고 있다. 평일이지만 방조제 안팎으로 낚시꾼들도 제법 보인다. 서해에서 가장 큰 섬으로 한때 해산물 수입만으로도 ‘부자 섬’으로 불렸던 대부도는 이제 ‘할머니 바지락 칼국수’라는 같은 이름으로 경쟁하는 수십곳의 식당으로만 영화로웠던 옛기억을 전할 뿐이다.

시화호 수문 쪽에서 좌회전해 방조제 안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시화호 안쪽 형도로 이어지는 도로 오른쪽은 ‘대송단지’라는 이름으로 장래 농지로 조성될 공간이 펼쳐져 있다. 왼쪽에는 영흥화력발전소에서 나오는 것으로 보이는 두 줄의 거대한 송전탑이 시화호 한가운데로 끝없이 이어진다. 

송전탑 바로 옆, 물이 빠져 드러난 갯벌에 스무 명 남짓의 사람들이 조개를 잡고 있다. 바닷물이 들어올 시기라 하나 둘 빠져 나오는 데, 손에 들린 망사 자루가 제법 묵직하다. 바지락과 동죽이다.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바닷물이 왕래하면서 그나마 죽음의 호수에서 벗어났다는 증거다. 송전탑이 즐비한 것만 빼면 여느 갯벌 풍경과 다르지 않다. 

정말 이곳 생태계는 평화를 되찾았을까? ‘조력발전으로 물이 급격히 불어 날 수 있어 시화호 출입금지’, ‘사망사고 발생이 높은 지역, 수상레저, 낚시, 수영 금지’, ‘감전 위험, 송전탑 부근 접근 금지’ 도처에서 펄럭이는 경고 플래카드들이 이곳이 영원히 안식을 잃어버린 위험지구임을 경고한다.

지난 20여 년간 시화호는 극심한 갈등의 공간이었다. 그리고 겉으로는 평온해 보이지만 갈등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시화호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고 앞으로는 어떻게 될까? 

 

중동 유휴 장비 및 인력을 위한 공사

‘경기도 시흥시 오이도와 옹진군 대부면 방아내리를 잇는 동양 최대(총연장 12.6킬로미터)의 시화 방조제가 87년 농업진흥공사(이하 농진공)의 기술진에 의해 착공돼 7년만인 94년 1월 24일 마침내 끝막이 공사를 완료하고 그 장대한 모습을 드러냈다. 이 공사의 성공적 수행으로 국토 확장은 물론 수자원 확보, 해안선 단축, 우량농지 확보와 첨단농업종합시범단지가 조성되고, 이 주변에는 천혜의 관광휴양단지가 조성될 것으로 그 효과가 기대된다.’

시화호 방조제가 완공된 이후 지역 주민들에게 배포된 농진공 선전물 내용 중 일부다. 방조제 완공 전부터 수질오염 문제가 심각하게 불거지고 있었지만, 사업을 밀어붙인 이들에게 이 사업은 이미 성공한 사업이었다. 그들은 그들의 장밋빛 환상을 세간에 퍼뜨리는 선전에 열을 올렸다. 그로부터 몇 년 가지 못해 우려됐던 재앙은 현실이 됐다.

1960년대부터 가능성이 검토되던 시화호 방조제가 공식적으로 발표된 것은 전두환 군사정권시절이던 1985년이었다. 당시 경제기획원은 시화지구 간척사업계획을 발표하면서 1단계로 27.4제곱킬로미터(830만 평)를 공단으로 조성하고, 2단계로 175.2제곱킬로미터(5300만 평)를 농지로 조성하겠다고 밝혔다. 방조제는 농진공이 공사를 맡고, 시화간척사업은 산업기지개발공사(수자원공사의 전신)가 담당하기로 했다. 경제기획원은 연 336만 명의 고용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고 했지만, 사실은 다른 의도도 갖고 있었다.

1980년대까지 갯벌은 그저 버려진 공간쯤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인구의 증가와 도시의 팽창에 따라 줄어드는 농지를 확보하면서 수자원을 개발할 수 있는 곳이 바로 갯벌이었다. 1960년대 간척사업이 본격화된 이래 서해안은 전 세계적으로 네덜란드와 더불어 간척이 가장 활발한 곳이었다. 다른 한편 70년대에 중동 건설 붐이 사그라지면서, 늘어난 장비와 인력을 국내에서 소화시켜야 했다. 1970년대 말부터 중동 유휴장비와 인력에 대한 사전대책을 주문하는 정부 공문이 있을 정도였다. 시화호는 두 목적을 충족시킬 시험지구였다. 

1985년 9월 당시 동아일보에 실린 “시화지구 간척사업은 해외건설 유휴 장비 및 인력의 활용과 경기진작 측면에서 서둘러 착공할 방침”이라고 한 정부 관계자의 말은 시화호 사업 추진의 숨은 이유를 드러낸다. 동양 최대 시화호 간척사업(이후 새만금 간척사업도 마찬가지)은 농지 건설과 이 농지에 물을 공급한다는 수자원 확보 명분 아래 대형 건설사와 정권의 이익 창출 사업이었던 것이다.

시화호 방조제 공사는 어업보상 문제 등으로 시간을 끌다 1987년 4월 29일이 돼서야 착공식이 열렸다. 이를 두고 당시 언론은 ‘서해안 시대가 막이 올랐다’며 ‘시화지구 간척사업은 개국 이래 국내 최대의 복합적인 개발 사업, 복합 국토 확장 사업’이라고 추켜세웠다. 구체적으로 ①169제곱킬로미터 국토 확장 ②101킬로미터 해안선 거리 단축 ③수도권공장 1600여 개 유치 ④1억8000만 세제곱미터를 담수해 91.1제곱킬로미터의 농경지에 용수 공급 ⑤서해 섬들을 연결해 교통 편리 및 관광명소 개발 ⑥인근 안산시와 연계 개발해 14만 명을 수용 할 수 있는 공단 배후도시 건설로 기존 수도권 인구과밀 해소 등을 목적으로 했던 것이 시화호 간척 사업이다. 

대형 개발사업은 의례 그렇듯이 시화호 지역도 외지 투기꾼들이 몰려와 투기의 공간으로 변했다. 방조제 공사 계획이 발표되기 전부터 투기가 시작 됐는데, 2년 만에 오이도 부근은 최대 40배가 오른 곳이 있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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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 세운 정책의 실패를 증명하는 시화방조제 조력발전소

 

시화호 장밋빛 환상, 그러나 현실은 참혹

시화호에 대한 한껏 부풀려진 사회적 분위기와는 달리, 급히 서두른 대형 국책사업인 만큼 공사 시작 직후부터 문제가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방조제 공사로 인해 바닷물의 수위와 수압의 변화로 인근 지역 방조제가 파손돼 농경지와 염전이 유실될 위기에 처한 일이 발생했다. 시화 방조제 바깥쪽 영흥도 부근에서는 조류의 변화, 유속 감소, 온도 상승으로 김, 굴, 바지락 등 양식업이 피해를 입었고, 오수와 토사의 유입에 따라 자연산 어패류가 폐사하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방조제 공사에 따른 주변 영향에 대해 제대로 검토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드러난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방조제가 완공되기 전부터 수질오염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1993년 12월 1일 자 『한겨레』는 “소양호보다 큰 시화호가 죽음의 호수가 되고 있다.”면서 대책을 촉구했다. 서울대 김정욱 교수는 “시화, 반월 공단과 안산시의 하수처리 대책이 세워질 때까지 최종 물막이 공사를 중단해야 한다.”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정부, 농진공, 수공 등 사업 추진 주체들은 이런 우려를 무시한 채 공사를 강행해, 1994년 1월 24일 기어코 방조제를 완공시켰다. 당시 들어간 금액만 1조 원이 넘는 상황이었다.

그로부터 1년 뒤, 시화호는 거대한 간장 빛을 띠며 썪어가며 사회문제로 떠올랐다. 1990년 대 초·중반 시화호 수질오염 현장 조사와 시화호 방류 저지 보트 액션 등을 기획했던 환경연합 시민환경보건센터 최예용 소장은 “90년대 초반부터 페놀 사건과 수돗물 중금속 파동 등 물 문제가 많았는데, 시화호 수질오염 문제는 90년 대 중반 물 문제의 핵심”이라 평가하고 있다. 

실제로 시화호는 1997년 3월 COD가 26ppm으로 농업용수는 물론 공업용수로도 쓸 수 없을 만큼 악화 됐으며, 식물성 플랑크톤의 과다 번식으로 부영양화 상태였다. 이로 인해 수십 만 마리의 물고기가 떼죽음 당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갯벌에서는 자연 상태의 수은의 4배, 구리 17배, 아연 32배가 검출 됐으며, 카드뮴의 경우도 0.015ppm으로 기준치를 초과 한 것이 드러났다. 오염된 시화호 물을 방류하면서 시화호 앞바다에서는 껍질이 일그러진 갑오징어와 척추가 휘거나 내장이 돌출된 망둥이가 잡히는 등 기형 물고기가 속출했다. 

방조제 사업 전 시화호 지역은 물고기들의 산란장이었다. 시화 방조제 환경영향평가 자료에 따르면, 시화호 바깥쪽의 바닷물 1세제곱미터 당 78개에서 3400개의 알이 있었으나, 안쪽에서는 7만8000개가 나올 정도였다. 방조제 이후 산란장 감소와 수질 오염 등으로 어종 자체가 1984년 21종에서 1992년 5종 내외로 급격히 감소하는 현상도 벌어졌다.

시화방조제와 시화호는 처음부터 입지 타당성이 없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와 같은 사실은 1996년 7월 5일 당시 환경부 장관의 시화호 수질 개선 대책 발표에서 “시화호를 둘러싸고 있는 지역은 유역에 큰 하천이 없어 담수자원 확보가 곤란하고, 유입된 물의 체류시간이 길어 수질이 쉽게 악화되는 등 입지 상 타당성이 부족하다”고 지적함으로써 확인됐다. 더욱이 그해 11월 감사원의 ‘시화 담수호 수질개선 사업 추진 실태 감사’결과 수질개선 시설도 부실한 것으로 드러났다. 

주민 피해가 급증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삶과 생계의 수단인 바다와 갯벌을 잃었다. 시민환경연구소가 1998년 발간한 『시화호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에 의하면, 주민들에게 조국의 발전을 내세운 국토 개발은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사안이었다. 바다를 메워 육지를 만드는 간척사업은 당연시 됐다. 지역에 돈이 돌고 땅값이 오르자 흥청거리는 분위기도 있었다. 보상비를 받아 공사 후 횟집 등 장사를 해서 관광수입을 올릴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 더욱이 공사과정에서 수공 관계자에 의해서 보상비 외에도 가구당 일정 정도의 간척지가 주워질 것이란 소문이 돌아 주민들은 더욱 기대감에 부풀어 올랐다. 

불행히도 그들의 바람은 백일몽이었다. 주민들은 적정 수준의 보상비는커녕 삶의 터전만을 잃었다. 쥐꼬리만 한 보상금으로는 투기꾼들이 올려놓은 땅값을 댈 수 없었고, 서툰 장사를 시작한 이들은 본전마저 까먹기 일쑤였다. 게다가 오염지역으로 소문이 돌자 어렵게 차린 횟집은 개점휴업 상태가 됐다. 농사도 피해를 입기는 마찬가지였다. 갯벌이 마르고 바람에 염분과 미세먼지 등이 날리면서 포도농장과 영지버섯 재배지에 피해를 입혔다. 무력한 분노가 주민들을 휩쓸었다.

 

대규모 개발 사업에 따른 갈등, 시화호의 민낯

2001년 2월 11일 정부는 시화호 담수호 계획을 백지화했다. 하수처리 시설 등 환경기초시설을 늘린다 해도 담수호 수질을 개선할 수 없다는 판단 아래 바닷물이 드나드는 해수호로 결정한 것이다. 더 많은 바닷물이 들어올 수 있도록 조력발전소도 추진키로 했다. 이는 정책의 실패를 의미한다. 1억8000만 세제곱미터를 담수해 농업용수와 공업용수를 공급하겠다는 것이 본래 목적이었으므로, 이후 공단 및 농지조성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예정에 없던 것이 추가돼 추진됐다. 그리고 이것 또한 다른 갈등을 잉태하게 된 원인이 됐다.

현재 시화호에는 북측 갯벌 9.2제곱킬로미터(280만 평) 부지에 산업단지로 예정된 시화멀티테크노밸리(이하 시화MTV)와 남동쪽 55.9제곱킬로미터(1690만 평)의 신도시인 송산그린시티가 건설되고 있다. 남서쪽으로는 43.9제곱킬로미터(1330만 평)의 농지가 조성되는 대송단지가 예정돼 있다. 

이 중 가장 먼저 추진 된 사업이 2001년 발표된 시화MTV 사업으로, 시작부터 논란이 많았다. 안만홍 전 시흥환경연합 사무국장에 따르면 시화MTV가 예정된 북측 갯벌은 연간 십여 만 마리의 철새들이 찾던 곳이자 멸종 위기종 맹꽁이의 서식지였다. 2001년 국감에서는 수공이 시화호 외해 오염이 가중될 것이라는 용역보고서를 은폐한 채 시화호 북측 간석지 개발을 추진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지역의 시민사회가 이러한 개발 사업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고, 사업이 미뤄지다 2004년 정부와 지자체, 사업시행자, 지역주민, 시민환경단체 등으로 ‘시화지역 지속가능발전협의회(이하 시화 지발협)’라는 민관 협의체가 구성됐다. 

이창수 전 안산환경연합 의장은 “시화 지발협은 시화호 수질 개선 및 공단 악취 등 대기환경 개선을 위한 환경개선기금(4500억 원)을 수공 등이 선투자하고, 이를 시화MTV 개발이익으로 충당한다는 것을 골자로 시화MTV 사업을 논란 끝에 협의해 줬고, 2007년 8월 15일 착공에 들어갔다.”라면서 “정부기관 등에서는 시화 지발협이 갈등 해결에 모범사례라고 평가하고 있지만, 논리적으로 상당히 부족한 면이 많다.”라고 지적하고 있다. 

시화 지발협 활동에 비판적인 단체들은 ‘시화호보전을 위한 전국대책위’를 구성해 활동을 벌였다. 이들은 ①시화MTV 사업은 시화호 연안의 생태적 지속가능성을 고려하지 못한 막개발 사업 ②시화호 북측 간석지는 경기만의 대표적 철새도래지 ③환경파괴적인 MTV 사업을 시화 지발협이 합의함으로써, 부당한 개발사업 조차 지역의 협의만 있으면 면죄된다는 잘못된 선례를 남기는 것이라는 이유로 시화 지발협 및 시화MTV 사업을 비판했다. 하지만, 공사는 중단되지 않았고, 시화 지발협도 여전히 운영중이다.

시화MTV 사업이 착공 된지 6년, 갈등은 풀리지 않았다. 오히려 골이 더욱 깊어진 상태다. 지역의 시민단체들은 시화MTV가 80~90퍼센트 분양된 현재 상황에서 수질 및 대기환경 개선 기금으로 선투자하기로 했던 4500억 원이 집행되기는커녕 아직도 조정중에 있다는 것을 비판하고 있다. 4500억 원에 대한 이자만 해도 큰 금액이라는 것이다. 또한 시화 지발협이 시화호 문제를 지역에 공론화 하지 않고, 지발협 내에서만 결정하려는 폐쇄성에 대해서도 성토하고 있다. 

담수호가 포기된 상황에서 시화MTV 및 송산 그린시티에 공급될 물은 멀리 팔당호에서 끌어와야 한다. 그만큼 비용과 에너지를 더 많이 쓰는 구조다. 대규모 개발에 따른 시화호 및 경기만 일대의 오염 부하량도 증가 할 수밖에 없다. 농지로 예정된 대송단지에는 비싼 팔당 물을 쓸 수 없어 현실적으로 아무런 대책이 없어 보인다. 대규모 개발은 진행되고 있고, 환경 개선을 위한 약속은 이행되지 않은 채 갈등의 골만 깊어 가는 상황. 이것이 현재 시화호의 민낯이다.

이창수 전 의장은 “시화MTV 및 송산 그린시티 지역이 보존됐다면, 현재 엄청난 관광자원이 됐을 것”이라며 안타까워하면서 “시화호, 새만금 사업 등이 제대로 평가되지 않아 4대강사업과 같은 일이 벌어 졌다. 지금이라도 시화호 사업과 주변 대규모 개발 사업에 대해 제대로 평가해야 한다.”라고 지적한다. 최예용 소장을 비롯해 지역 인사들도 개발이 진행되고 있는 현재 상황에서 최대한 보전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고 주문한다. 이미 대송단지 일부 구간을 안산시가 람사르 습지 지정을 위해 추진하는 것처럼, 개발할 곳, 보전할 곳, 복원할 곳을 충분한 논의를 통해 선정하자는 것이다. 

『시화호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에서 저자들은 시화호 사업을 ‘사기꾼 없는 거대한 사기극’이라 표현하고 있다. 갯벌이라는 자연의 선물을 개발동맹의 먹이감으로 전락시킨 시화호의 사기극은 망각 속에 묻혔고 다시 새만금과 4대강으로 비극은 이어졌다. 이 비극적인 사회적 망각은 토건세력이 정치, 경제, 언론을 장악하고 있는 우리 사회의 현 수준을 그대로 보여준다. 망각된 역사는 언제든 되풀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시화호 사기극의 진실을 지금이라도 추적하고 밝혀야 할 일이다. 

 

글 이철재 에코큐레이터, 환경운동연합 정책위원 leecj@kfem.or.kr  

사진 이성수 기자 yegam@kfem.or.kr